임차한 창고·상가에서 불이 나면 빌린 부분이 탄 손해는 임차인이 무과실을 증명해야 벗어나고, 번져나간 외부 손해는 임대인이 임차인 과실을 증명해야 물릴 수 있다. 201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번진 부분의 증명 부담은 임대인에게 넘어갔지만, 빌린 부분 자체는 여전히 임차인에게 불리한 구조다. 원인 규명 전에도 책임이 생길 수 있으니 임대차계약의 원상회복 특약과 임차자배상책임보험 가입 여부를 지금 확인해두는 편이 낫다.
2026년 9월 18일 오후, 인천 경서동의 한 물류창고에서 불이 났다. 창고 밖에 쌓아둔 상자에서 시작된 불이 8천㎡ 규모 건물로 번졌고, 소방당국은 대응 2단계를 발령해 7시간 만에 큰불을 잡았다. 관계자 34명이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가구와 화장품 등 물품 피해가 남았다.
이런 소식을 접한 임차인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하나다. 내가 빌려 쓰는 창고나 상가에서 불이 나면, 그 손해를 전부 내가 물어줘야 하나. 답은 "어디가 탔는지"와 "누가 무엇을 증명하는지"에 따라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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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원인은 대개 경찰·소방 합동 감식으로 가려진다. 인천 화재도 원인은 감식을 통해 조사할 예정이다. 그런데 원인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고 해서 임차인이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임대차 목적물이 화재로 소실돼 임차인의 반환의무가 이행불능이 된 경우, 임차인이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사유로 생긴 일"임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본다. 원인 불명이라는 상황은 임차인이 그 증명에 실패했다는 결과로 이어지기 쉽다. 빌린 창고 자체가 탄 부분은, 임차인이 스스로 결백을 입증해야 하는 구조인 셈이다.
2017년 5월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2다86895)이 이 지점의 기준을 바꿨다. 이 판결 전에는 불이 임차 공간을 넘어 건물 다른 부분까지 번져도, 임차인이 주의의무를 다했음을 증명하지 못하면 번진 부분까지 책임졌다.
판결 이후에는 달라졌다. 임차한 부분을 벗어나 번진 손해에 대해서는, 임대인이 임차인의 계약상 의무 위반과 그 위반이 번진 손해로 이어졌다는 상당인과관계, 그리고 민법 제393조가 정한 배상 범위까지 주장하고 증명해야 임차인에게 책임을 물릴 수 있다.
정리하면 두 갈래다. 빌린 부분이 탄 손해는 임차인이 "나는 잘못 없다"를 증명해야 하고, 번져나간 바깥 손해는 임대인이 "임차인 잘못이다"를 증명해야 한다. 증명의 부담이 정반대로 놓여 있다.
실화책임법도 함께 봐야 한다. 이 법은 2007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거쳐 2009년 5월 8일 전부개정됐다. 개정 전처럼 경과실 실화자를 아예 면책해 주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과실이 아닌 경우 배상 의무자가 법원에 손해배상액의 경감을 청구할 수 있도록 바꿨다. 민법 제765조의 특례다.
주의할 점이 있다. 이 경감 청구는 실화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에 대한 특례이고, 임차인이 임대차계약상 반환의무를 다하지 못해 지는 책임과는 결이 다르다. 전기 설비 방치나 담뱃불처럼 중대한 과실이 인정되면 감액 여지는 좁아진다. 반대로 경과실이라도 책임이 계약 불이행 쪽으로 구성되면 경감 청구가 그대로 통하지 않을 수 있고, 이 부분은 사안마다 다투어진다.
경과실이니 괜찮겠지라고 안심하기보다, 원인 규명과 보험을 함께 챙기는 편이 현실적이다.
불이 난 뒤가 아니라 평소에 짚어둘 항목들이다.
같은 창고, 같은 화재라도 계약서 한 줄과 보험 가입 여부에 따라 부담은 크게 달라진다. 불길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서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