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8월 28일 조희대 대법원장이 서면으로 제청한 손봉기 후보에 대해 재제청을 요청하며 대통령의 임명권과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헌법에는 재제청 요청이라는 절차 자체가 없어 대법원장이 이를 따를 법적 의무가 있는지가 쟁점이다. 대법원장이 수용·거부·권한쟁의 중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후임 대법관 임명이 몇 달 미뤄질 수 있으니 그 입장 표명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대법관 한 자리를 채우는 데는 세 주체가 관여한다. 헌법 제104조 제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정한다. 순서대로 보면 대법원장이 후보를 골라 제청하고, 국회가 인사청문을 거쳐 동의하고, 마지막에 대통령이 임명장을 준다.
권한이 셋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대법원장은 제청권, 국회는 동의권, 대통령은 임명권을 가진다. 1987년 개헌 때 국회 동의권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3단계가 됐다. 사법부 인사에 특정 권력이 독주하지 못하게 견제 장치를 둔 셈이다.
이번 인선은 노태악 전 대법관의 후임을 뽑는 절차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8월 18일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를 후보로 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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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은 제청 그 자체가 아니라 제청 방식에서 시작됐다. 그동안 대통령과 대법원장은 물밑에서 후보를 조율한 뒤 대면으로 제청하는 관행을 지켜왔다. 이번에는 조 대법원장이 사전 협의 없이 서면으로 제청했고, 청와대는 이를 문제 삼았다.
청와대는 8월 28일 재제청을 요청했다. 강유정 수석대변인은 "그 절차적 완결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고 밝혔고,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의 임명권은 대법원장의 제청권에 기속되지 않은 권한"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나온 제청을 접고 다른 후보를 다시 올리라는 요구다.
여기서 짚을 대목이 있다.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재제청 요청'이라는 절차는 없다. 대통령이 이미 제청된 후보를 되돌려 보내는 일 자체가 사실상 전례가 없다. 관행이던 사전 조율이 깨지자, 그동안 관행으로 덮여 있던 권한의 경계가 드러난 것이다.
법적으로만 보면 대법원장이 재제청 요청을 따라야 할 의무는 명문화돼 있지 않다. 헌법이 제청권을 대법원장에게 준 이상, 누구를 올릴지는 대법원장의 권한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국회에서도 견해가 갈렸다. 국민의힘 조배숙 의원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제청을 반대할 수 있다고 해석하면 "대법원장의 제청권은 대통령에게 후보자를 추천하는 정도의 '건의권'으로 추락한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더불어민주당 이건태 의원은 불필요한 갈등을 막으려면 제청 단계에서 대법원장의 제청권과 대통령의 임명권이 일치하는 적임자를 찾아야 한다고 봤다.
법원행정처 노경필 처장은 8월 31일 국회에서 "개인적으로는 각자의 권한이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동안 관행적으로는 실질적인 합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답했다. 권한은 각자 있지만 현실에서는 합의로 굴러왔다는 뜻이다. 이번 사안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 조문이 침묵하는 자리를 관행이 메워왔는데, 그 관행이 깨진 상황이라 정답이 조문에 적혀 있지 않다.
당장은 대법원장의 선택에 달렸다. 크게 세 갈래다. 새 후보추천위원회를 다시 꾸려 제청하거나, 기존 추천위가 올린 후보 중 다른 사람을 다시 고르거나, 청와대의 요구 자체를 권한 침해로 보고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는 방안이다.
어느 길이든 시간이 든다. 추천위를 새로 구성하면 두 달가량 걸릴 수 있다. 기존 후보 중 재선택하면 빠르지만, 청와대가 그마저 다시 되돌려 보내는 상황이 반복되면 제청권이 사실상 무력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남는다.
조 대법원장은 8월 28일 "다음주 중 입장을 내겠다"고 했다가, 부친상을 치르고 9월 3일 복귀한 뒤에는 발표 시점을 미뤘다. 정리하면, 후임 대법관 임명은 이 교착이 풀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대법원장이 어떤 카드를 고르느냐에 따라 임명은 몇 달 뒤로 밀릴 수 있다. 뉴스에서 '재제청'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후보가 누구냐보다 대법원장이 요청을 받을지 거부할지를 먼저 보면 흐름이 잡힌다.